저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보는 편이지만 몇몇 작가에 대해서는 특히나 빠가 되어 무조건 봅니다. 특히나 야구와 소꿉친구의 아다치 미츠루라던가 샐러리맨과 썰렁한 개그의 유우키 마사미 그리고 오해와 고집의 다카하시 루미코. 이 세 작가에 대해서는 '이들의 만화가 재미없다면 만화가 재미없는 게 아니라 내가 잘못읽은 거다!'라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그런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는 만화가의 작품들 중에서도 루믹여사의 메종일각은 좀 특별한데, 왠만한 문학작품보다 더 크게 제 가치관을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메종일각을 접할 당시만해도 머리가 굳어있던 청소년이었던터라 여주인공이 미망인이라는 부분부터 이미 불편한 작품이었던 겁니다. -왜, 그런거 있잖습니까? 여자주인공은 남자경험이 없어야한다.- 더군다나 일각관의 주민이란 작자들은 그렇게 혐오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허구한 날 술이나 퍼마시며 끝없이 주인공을 방해하고 괴롭히는 악의 무리로 밖에 보이질 않았거든요. 방탕한 술집여자에 협박이나 하는 아저씨에다가 술에 쩔어서 자식은 챙기지도 않는 아줌마에게 호감을 주기에는 무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만화를 끝까지 봤던 것은 오로지 루믹여사의 작품이어서였으니, 그때부터 빠의 기질이 있었던 거지요. 아무튼 신기하게도 처음에는 불쾌감을 참아가며 읽던 것이 어느덧 그 캐릭터들에 이입을 하게되더란 말입니다. 주인공을 놀려대던 악의 무리들은 친근한 이웃으로 보이고 미망인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싶던 것이 사람이라면 당연한 거구나 싶었습니다. 그렇게 한 번 머리가 말랑해지니 훨씬 다양한 장르와 소재의 작품들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기존에 얻었던 지식들을 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바로 이 만화가 '오해와 고집의 다카하시 루미코'라는 인식을 심어주기도 했습니다. 아다치가 야구와 소꿉친구로 수십권 우려먹는 것 처럼 루믹여사도 다양한 작품을 그리지만 장편을 끌어나갈 때 주로 써먹는 건 오해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이 오해라는 요소를 잘 활용하기 위해 고집쟁이 캐릭터가 들어가지요. 물론 이거야 다른데서도 다 써먹는 거지만 똑같은 재료도 어떻게 요리하냐에서 차이가 나듯이 아직 루믹여사만큼 적극적으로 써먹으면서도 적절한 배치를 이루어내는 작가는 못 봤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오해와 고집이 막무가네가 아닌 공감할 수 있고 설득력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사소한 묘사들이 빈틈이 없어요. 쿄꼬가 미타까와 데이트 가는 걸 보면서 모처럼 준비했던 영화표를 홧김에 찢어 버리려던 고다이가 비싼 표값을 생각하며 끝내 찢지 못하는 장면처럼 고다이의 약한 성격이 드러나는 부분이나, 고다이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을 것터럼 굴면서도 여자한테서 고다이를 찾는 전화가 오면 삐지는 것과 같은, 인물들의 성격이 드러나는 부분을 적절히 깔아놓으니 어색하지가 않습니다. 이런 연출의 기술이 늘어나는 게 눈에 보이니 즐거워요. 시끌별녀석들이 란마1/2로 변해가는 그림체를 감상하는 것도 재밌고요.
이와 같은 잔재미 외에 이거야말로 백미다 싶은 것은 감동과 웃음을 함께 버무리는 부분입니다. 그 많은 우여곡절 끝에 쿄꼬와 맺어지게된 고다이가 시골집에 내려갔을 때, 할머니가 고다이를 따로 불러다 놓고 농하듯이 결혼비용으로 쓰라고 장례식 비용을 모아놓은 통장을 건네며 죽기전에 갚으라고 하는 찡한 장면에서 감격한 고다이의 대사. '근사하게 장례치러 드릴게요.' 전, 정말 이 장면에서 깊이를 조절하는 감각에 새삼 감탄했었답니다.
그나저나 이 늦은시간에 감상문을 가장한 빠심 가득한 글을 늘어놓는 이유는 만화책으로 읽고 싶어서요.
서울문화사에서 도레미하우스로 출간했던 것들은 이제 구하지도 못합니다. 비록 무성의한 번역에 지금 같은 일본식의 우철이 아니라 우리식의 좌철이라 읽기에 헷갈리는 면이 있었다지만 그때 집에다 모셔놓지 않았던 게 얼마나 후회되는지 모릅니다. 일본에서는 와이드판도 나왔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애장판으로 다시 안내주나 모르겠습니다. 서점에 깔아만 주면 득달같이 달려가 살텐데 말이지요.
여담이지만 얼마전에 이토 미사키가 쿄꼬를 맡은 메종일각 드라마를 봤는데 세트만 잘만들었더군요. 어찌나 지겹던지 보다 잠들뻔 했습니다. 그래서 더 만화책이 그리워요. 애니 DVD도 나와주면 좋겠는데 어려울 것 같고, 일본어를 배워야되나 고민중입니다.
참, 메종일각에 대한 글이 뭐이리 내용이 없나 싶으신 분들은 여기에 가보세요.
원래사이트는 이 블로그의 링크에도 있으니 한 번 가보세요. 정말 루믹에 대한 모든 것이 있는 곳이라 종종 구경간답니다.
쓰고싶을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