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듀나의 '대리전'은 처음에 제목만보고 무슨 양반전, 배비장전 같은 것의 패러디로 붙인 이름인가 했는데 내용이 말그대로 대리전(代理戰)이였더군요. 그런 거야 어쨌거나 평소의 듀나체 그대로라는 게 싫었습니다. 번역된 코니 윌리스의 문체마냥 수다스러우며 라이트노블마냥 갖다붙이는 비유는 읽기가 꽤 피곤하더군요.
오경문의 '오래된 이야기'는 한번쯤 써먹는 창세기 울궈먹기였고, 이영도의 '카이와 판돔의 번역에 관하여'는 꽤 괜찮았는데 주제가 너무나 강렬히 드러나는 너무나 이영도스러운 글이었습니다. 김보영의 '땅 밑에'는 역발상이 특이했고, 김덕성의 '얼터너티브 드림'은 해괴하더군요. 단편이긴한데 이거 하나로 완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찝찝한 글이었거든요. 이한범의 '사관과 늑대'도 찝찝하기는 매한가지라, 둘 다 장편이 따로 나오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고장원의 '로도스의 첩자'는 재밌었지만 반전이 반전 같지가 않더라고요. 복거일의 '꿈꾸는 지놈의 노래'는…유일하게 차분한 분위기라 돋보이기는 한데 재미는 없더군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하는 느낌. 노성래의 '향기'는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습니다. 사람같지 않은 사람의 사람 같은 면모를 잘 보여주더군요.
신윤수의 '필멸의 변'은 매우 안좋은 편이었습니다. 초반에 잔뜩 벌려놓고는 뒤는 흐지부지 되는 매우 한국적인 양상이라 실망감도 제일 컸어요. 뭡니까 대체. 파파는 할 일이 있다고 그 난리를 쳐놓고는 결국 도망이나 가고 말이죠. 파파의 뜻을 따르느라 죽은 사람이 몇인데, 자신의 죽음을 미루면서까지 할 일이란게 고작 애들데리고 딴데가서 사는 거라는 게 납득이 가겠냐고요. 그보다 더 황당한 건 자기 정체를 알고 급격히 무너져 가는 하진석인데,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 녀석은 자아존중감 같은 것도 없데요? 어떻게 그런 상황을 그렇게 쉽게 순순히 받아들인답니까!
책의 서문1만 보면 어렵게 작품들을 모아서 웹진으로 내고, 이런 게 쌓여서 한국SF가 발전하고, 한국적 SF의 토대가 마련되는 거라고 생각할 순 있지만, 책으로 출판해서 뿌릴 생각이었다면 적어도 가필이나 수정 정도는 작가들에게 부탁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렇게 한 게 이 수준이라면 할 말이 없고요. 아무튼 작품마다 편차가 상당하기는 해도 훌륭하다 싶은 것도 두세편 정도는 들어있으니, 첫 모음집으로는 나쁘지 않은 셈이려나요.
- 서문을 보고 구매할 의향이 생겼다면 말리고 싶습니다. 상당히 그럴싸하게 포장해놨는데 집필 의도가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몰라도, 그걸 제대로 전달할 수준이 아니다 싶은 것도 같이 묶어 의미부여했더라고요. [Back]
쓰고싶을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