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다 감독의 전작들을 제대로 본 게 하나도 없습니다. '디지몬'은 그저 중딩용 만화려니 하고 안봤고, '시간을 달리는 소녀' 또한 원작을 읽고는 볼 필요까지 있으랴 싶어 안봤습니다. 그래서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봤는데 훌륭한 오락 애니메이션을 건졌군요.
보러가기 전에 평이 엇갈리는 터라 심야에 8천원을 내고 볼 가치가 있을까. 차라리 조조로 방학맞은 애들 틈에 파묻혀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으나, 얼마전에 '업(UP)'을 보면서 겪었던 끔찍한 관람환경을 떠올리고는 심야로 끊었는데 탁월한 선택이었어요. 어린 애들이랑 봤으면 분명 여기저기서 '왜 저러는 거야?'와 '엄마, 나 쉬.' 같은 것들에 방해받았을 겁니다. 애들은 피했지만 그래도 불만은 있어요. 이건 디지털로 봐야할 작품인데 CGV는 아날로그 밖에 없더라고요.
미리니름이 있는 감상평.
과연 일본이 미국 흉보는 만화인가?
보기전에 접한 평들중 가장 신경 쓰였던 건 이 작품에 내포되어있는 일본의 그릇된 세계관에 대해 토로하는 거였습니다. 하지만 보고나니 대체 뭘 보고 그런 감상을 가졌는지 궁금하더군요. 미국이 원흉이란 것으로부터 일본의 대미(對美)컴플렉스를 끄집어 내는 건 머릿속에 정치적 블랙홀이 있는 게지요. 무엇이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틀 속으로 빨아들이는 블랙홀 말입니다.
여기서 악역을 맡은 미국은 냉전시대 헐리웃 오락영화의 소련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저 누군가 대형사고를 친다면 저녀석이겠지 하는 수준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여기에 대고도 미국인들의 뿌리깊은 공산주의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어쩌고 운운 하기도 하지만, 오락영화에서 그런식의 분석이 재밌기는해도 경계하는 편이라서요. 빨간 것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는 시각과 별반차이없는 경직성이라고 보거든요.
일가친척들이 모이는 즐거움
나이를 먹을 수록 친척들이 싫어지긴 했습니다만 어린시절을 생각하면 명절이나 제사 때 친척들이 모이는 걸 아주 좋아했습니다. 또래의 사촌도 만날 수 있었고 용돈도 두둑히 챙기는 데다가 맛있는 것도 잔뜩 쌓여있는 행복하기 이를데 없는 시기였으니까요. 이 작품은 바로 그런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냥 그런 좋은 모습만 보여준다면 그냥 허황되기만한 만화지만, 보면 꽤 신경을 썼어요. 첩의 자식도 자기자식처럼 키운 할머니라든지, 한재산 들고 날랐던 삼촌이 돌아오는 거나 여자들이 집안일을 하는 모습(그와중에 큰아들이 갑자원 나가니까 팽개쳐두고 TV앞에 붙어있는 엄마라든지). 애들이 뭉쳐서 노는 것 등등. 일본이나 우리나 어울리는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아 정겹더군요. 뭐, 일본보다 위계질서가 강해서 카즈마처럼 형한테 했다가는 작신작신 두들겨맞았겠지만 그 푼수같은 사촌형은 제 사촌형과도 상당히 비슷했던지라;;
일반적인 친척들이 모였을 때의 떠들썩함에서 돈문제를 저만치 밀쳐놓은 듯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잘 살렸더라고요. 할머니의 생사에 따른 분위기의 변화도 적절한 연출이었다고 봅니다. 솔직히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난리통을 진정시키는데 일조한 할머니를 그렇게 죽일지는 몰랐어요.
그 전화 거는 장면을 보고는 '옳커니, 이것은 타인과 관계맺기를 두려워하는 현재 젊은세대들에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우치고, 개인 대 개인의 관계로만 맺어지며 가족을 배제하는 트랜디하고 가벼운 작품들만 쏟아져 나오는 세태에 경종을 울리고자 함이구나!'라는 뻘생각을 떠올리게 할 만큼 의미있어보였거든요.
그런데 열도애들은 원기옥을 참 좋아하는 듯
막판에 화투로 싸울 때는 완전히 '드래곤볼'의 원기옥 발동이더군요. 그게 꼭 나쁜 건 아닙니다만, 구태의연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 밖에도 몇몇 일본만화에 흔히 나오는 것들이 있는데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부분이니 넘어가지요. 이는 좋게 보면 일본내수시장만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한계일 수도 있지만 국가간의 감성차이로만 보기에는 좀 많이 써먹어온 요소들이기에 단점으로 볼 수 있겠네요.
PPL은 마즈다, 델, 소니가 아닐까 싶어요. LGT의 오즈가 PPL이란 글도 봤는데 오즈는 그냥 신이 내린 PPL이더군요.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으나 이름과 브랜드색이 맞아떨어진 경우랄까요. 그렇다해도 다른 일본 애니메이션들과는 다르게 국내 통신사의 덕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홍보효과를 더 크게 누린 건 '썸머워즈' 쪽이겠네요. 사실 이작품에 대해 관심을 가질만큼의 정보를 처음 접한 건, 구독하고 있던 LGT의 오즈 블로그를 통해서였으니까요.
어쨌든 봐서 돈아까운 만화는 아니었어요. 실컷 웃으면서 즐기기에 흡족한 작품이었습니다.

내 밑으로 다 집합. 10초내로 튀어와라.

제, 제가 제일 먼저 왔습니다!!
위의 두 장면이 연관된거라 믿었다면 낚인거라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