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가 매우 사소한 부분이지만 바뀌지 않아서 조금 놀랬던 게 있는데 신지가 여전히 DAT를 쓰고 있었다는 것과 조명기구가 원형 형광등이라는 점입니다. 배경이 지금보다 6년 후인데 지금은 mp3에 밀린 MD와 차세대 워크맨 자리를 다투다 전문가들이나 쓰는 매체로 입지가 좁아졌던 DAT를 고수하는 걸 보면 신지는 상당히 매니악한 녀석인가 봅니다. 그리고 원형 형광등은 이미 새로 짓는 아파트에선 쓰지도 않는 구형이라더군요. 의외로 균형이 맞지 않는 미래에요.
TV판 6화까지의 내용을 압축한 이번 극장판은 여러모로 흐뭇하더군요. 시간관계상 인물들의 성격을 나타내는 장면들과 초호기가 신지와 예사롭지 않은 인연이 있음을 암시하는 장면이 사라졌지만, 덕택에 다른 걸 넣을 시간이 생겼는지 좀 우스운 모양새긴 해도 '신세기'라 써놓고 '세기말' 분위기만 풀풀 풍기던게 정말 '신세기'가 되었더군요.
바로 신지의 변화인데요. 작품내내 찌질거리지만 폭주라는 스킬 아닌 스킬을 가지고 있던 무적의 서드 칠드런은 야시마 작전에서 주변과 상황에 떠밀려서가 아닌, 자기 의지로
원기옥양전자포를 발사하는 성장을 보여줍니다.

훈남 신지. 하는 짓도 전보다 많이 쿨해졌다.
원래는 신지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서 에바를 타는 것은 더 후의 일이었죠. 그런데 이미 야시마 작전에서 자기가 에바를 타는 것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걸려있는지를 깨달았고, 켄스케와 토우지의 메세지로 공포를 이겨낼 만큼 성장을 해버립니다. 세기말의 암울한 분위기를 타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며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나 드러내면서 찌질거리던 녀석치곤 놀라운 발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전보다
훈남이 되었더군요. 그리고 이런 점이 저로 하여금 다시 기대를 갖게 하더군요. 긍정적인 변화를 보인 주인공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란 희망을 주니까요.
사실 저는 전에 나온 극장판 에바게리온을 보지 않았습니다. 내용에 대해서 듣고는 도저히 인정을 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 끝도 없는 허무라니! 게다가 오타쿠더러 밖에 나와 놀라는 식의 훈계는 오타쿠 1세대인 안노 감독이 할 소리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고, 여러모로 마음에 차지 않았거든요.
이번에 개봉한 극장판은 TV판을 압축하고 새로 덧붙여서 내놓은 거라 기대에 못미치는 부분도 있지만 -
대폭 잘려나간 인물묘사나 다소 매끄럽지 못하게 된 상황의 연결, 원작에 무게를 더해주던 보수적인 디자인의 장비들이 요즘의 현란한 스타일로 새 단장하는 바람에 생긴 괴리감 같은 - 대신, 신기술에 힘입어 새롭게 제작된 화면과 소리는 참 대단하더군요. 사골게리온이라 불리지만 아직 단물은 안빠졌습니다.